도량에 청렴이 몸에 밴 두 정승 이야기 - 맹사성
맹사성孟思誠은 정승 노릇을 수 십 년에도,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만큼 허술했으
, 출입할 적에는 “쉬 물렀거라” 벽제 소리가 요란하기는커녕 소를 타고 다녔다.
그가 온양에 근친부모를 뵘하러 오가면서도 관아官衙에 들리지 않고 간소한 행차였다.
‘양성’과 위’ 두 고을 원이 맹정승을 마중 나와 장호원에서 길을 깨끗이 닦고 기다렸는데, 그 앞으
로 소를 타 지나가는 노인이 있기에 못마땅해 하면서 역졸을 불러 꾸짖게 했다. “내가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佛’이라 일러라”라는 말을 역졸이 고하자, 두 군수가 놀라서 달아나다가 둑 아래 연못에
인印을 떨 려, ‘도장이 빠진 못印浸淵’ 전설이 생겼다.
맹정승이 사는 집이 너무 좁아서 병조판서가 공무를 품의 하러 왔다가, 마침 소나기가 내리자 지붕이 새어 내려서 의관이 모두 젖었다. 돌아와 병판이
탄식하기 해 마지않기를 “정승 집이 그러한데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할까보냐”며 짓던 행랑을
뜯어내게 했다. 온양서 귀경길에 용인에서 비를 만나, 정자에 들렀더니 먼저 누각 위에 먼저 온 이가 있었는데 의정 ‘녹사구실아치’ 벼슬을 구하러 간다며, 아래층에 좌정한 정승을 불러올려 얘기를 나눴다. 말을 올 내리기가 거북하니 ‘공’ ‘당’ 토를 농 삼아 넣기로 했다.
“무엇하러 서울올라 가능공”
“버슬 하러 올라간당”
“무슨 벼슬인공”
“녹사 취재取才 사람을 뽑음란당”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맹사성의 말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그가 답했다.
뒷날 좌의정으로 정부의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하러 들어와 뵙기에 “어떠한공” 하니까,
그때사 비로소 깨닫고는 “죽어지당”하니, 좌우 모두 들 놀라며 괴이하게 여겼다.
그를 녹사로 등용했음은 물론 나중에 ‘고불古佛’의 추천으로 어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게 되었 다. 훗날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공당 문답]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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