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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 속 청렴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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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한 선비의 향기 - 퇴계 이황 퇴계는 별세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 4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寗을 불러서 4언言 24구句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파란만장한 자신의 일생을 96글자의 한시로 압축한 것이다. 퇴계가 특별히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엔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장황하게 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묘비명은 퇴계가 어떤 사람이며, 평생 놓지 않았던 학문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면서 병도 많았네 중년엔 어찌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만년엔 어찌 외람되이 벼슬 높았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벼슬길에 나감에 차질이 많으니, 물러나 숨어 살기로 뜻 더욱 굳혀졌네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진실로 성현 말씀 두렵구나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흐른다 시원스럽게 나부끼는 초복初服, 처음 복장, 모든 비방 씻어버렸네 나의 품은 뜻 이로써 막힘에, 나의 패물은 누가 완상해 줄까 내가 옛사람을 생각하매, 진실로 내 마음에 부합되누나 어찌 내세를 알겠는가, 지금 세상도 알지 못하거늘 근심 속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네 저 세상으로 떠나며 이 생을 마감하노니, 여기 다시 무엇을 구할소냐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수양하면 이토록 간단명료하고 겸허하게 자기 정리가 되는 것일까. 대부분 위인들은 그 탄생이 예사롭지 않고, 자랄 때도 남다르고, 어른이 돼서는 자신의 뜻을 크게 펼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퇴계는 한 줌 과장없이 그저 보통 사람처럼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묘비명에 잘 드러나듯 퇴계의 사람됨은 ‘겸허’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퇴계는 일생 벼슬 욕심 없고, 자신을 과시하는 법이 없었다. 퇴계와 도산서원 서원 앞에 이르면 가장 먼저 안동댐 안에 동그랗게 떠 있는 인공 섬이 보인다. 그곳은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치렀던 시사단이다. 본래의 터가 안동댐에 수몰되어 지금처럼 높이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서원 앞의 큰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서생들의 기숙사였던 농운정사가 工자 모양으로 서 있고, 오른쪽으로 도산서당이 앉아 있다. 도산서원은 본래 도산서당에서 출발한다. 퇴계는 삼십대 초에 관리 생활을 시작했지만, 사십대 중반에 사화를 겪으면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거처를 정한 곳은 고향인 안동 온혜에서 가까운 토계兎溪였다. 그는 벼슬길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를 살려 토계를 퇴계退溪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퇴계라 했다. 그러나 이곳은 학문 수련에 적합한 터가 아니었다. 다른 거처를 찾아 나선 퇴계는 마침내 도산 남쪽에서 좋은 터를 발견한다. 퇴계는 이곳에 건물 두 채를 짓는다. 도산서당 세 칸과 농운정사 일곱 칸이 그것이다. 서당은 초가집 세 칸에 불과한 서당이었지만 퇴계는 오히려 불필요하게 크게 지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얼마 후 안동의 부잣집 아들이 입학하자 그 부모가 역락재를 지어 기증했다. 농운정사는 강의실로, 역락재는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성현의 말씀’을 따라 한결같이 학문에 정진했다. 율곡은 퇴계를 정암 조광조에 견주어 "재주와 그릇은 정암에 못 미치지만 의리를 깊이 궁구하여 정미精微를 다한 데 이르러서는 정암이 못 미친다" 하였다. 퇴계학은 그 자신이 구도자적 자세로서 진리탐구에 혼신의 노고를 바쳐서 쌓은 ‘공든탑’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퇴계는 ‘주자의 도통을 이은 사람은 오직 퇴계이다’, ‘퇴계학은 유학, 주자학의 적통嫡統이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농운정사를 지나 진도문을 나서면 서원의 중심이 되는 전교당보물 제210호 앞에 서게 된다.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고 강의를 했던 집회장소이다. 이곳에는 범상치 않은 글씨의 ‘도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것은 선조의 어명을 받은 한석봉의 친필이다. 퇴계의 유물은 농운정사 뒤쪽의 옥진관에 들어 있다. 이곳에는 퇴계의 지팡이, 매화등, 벼루, 투호, 지구의, 책자 등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청량산인과 청량산 도산서원을 둘러본 후에는 20분 거리에 있는 청량산을 찾아가는 게 순서다. 청량산에서 퇴계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55년 겨울, 50대 중반인 퇴계는 수십 년 만에 청량산을 찾았다. 그 무렵 산에는 큰 눈이 내렸다고 한다. 눈 수북한 태초의 신비 속에서 퇴계는 한 달을 머물렀다. 그리고 <11월에 청량산으로 들어가다>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에서 퇴계는 ‘저 하늘에 꽂힌 재에 올라 우주를 두 눈으로 다 보고 싶다’ 는 호연지기를 발산한다. ‘우주적 시야’를 눈뜨고 싶어했던 퇴계가 자신의 별호를 ‘청량산인’으로 바꾼 것은 이 무렵이었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그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계는 청량산 남서쪽 줄기가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 예안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퇴계는 청량산에 탯줄을 빌린 셈이고, 훗날 청량산은 퇴계로 인해 더욱 큰 이름을 얻는다. 퇴계는 15세 무렵인 1515년 숙부와 형을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청량산과 첫 대면하게 된다. 그때에 벌써 청량산을 자기 산으로 ‘찜’ 해 놓았던 것이다. 퇴계가 일생 청량산을 노래한 시가 무려 50편이 넘는다. 퇴계가 청량산에 머물렀던 장소에 제자들이 세운 ‘청량정사吾山堂’가 있다. 이곳은 연꽃처럼 펼쳐진 청량산 12봉을 배경으로 서 있고, 그 기운이 수렴되는 기막힌 장소다. 퇴계는 시간만 나면 이곳에 머물며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흰 기러기’라고 읊었다. 이러한 퇴계의 청량산 사랑은 그의 묘비명에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흐른다’는 구절로 나타난다. 퇴계가 항상 그리워하고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연은 퇴계에게 큰 정신적 위안과 창조적 동력을 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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