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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 속 청렴 이야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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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편하게 다스리는 목민관 - 신재 주세붕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賜額이란 임금이 서원에 현판을 써서 내리는 것을 말한다. 1541년중종 36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듬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고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 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에 학문 부흥의 의지가 담겨 있다. 소수서원은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사학으로서 공인된 교육기관의 위치를 확보하여, 그 뒤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원이 단순히 제사와 교육적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들의 정치사회 활동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풍류와 학문이 만나는 공간 소수서원은 인삼으로 유명한 경북 풍기 옆 고을인 순흥면 내죽리, 소백산이 보이고 죽계천이 유장하게 흘러나가는 명당에 안겨 있다. 서원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울창한 솔숲이 반긴다. 이 소나무들은 흔히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데, 이는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라고 한다. 솔숲 오른편으로 당간지주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였다.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의 힘이 축소되고 유교의 세력이 커지던 조선 시대에는 이렇듯 절터가 서원터로 바뀌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주세붕이 이곳에 서원터를 닦다가 땅에 묻힌 구리 3백여 근을 얻게 되고숙수사의 옛종 이것을 팔아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학생들의 장학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당간지주 앞으로 소박한 정자와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 경렴정은 주세붕이 세운 정자로 죽계천과 그 건너편 취한대 정자가 시원하게 보이는 장소다. 이곳에서 죽계천 건너편으로 백운동白雲洞과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주세붕이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밤만 되면 혼령들이 이 바위에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주세붕이 그 연유를 물으니, 혼령들은 예전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희생된 백성이었다. 이에 주세붕은 날을 택해 위혼제를 드리면서 경敬자에 붉은색을 칠했다. 이후 다시 혼령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경敬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로써 원귀들의 한이 위로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원의 출입문은 경렴정 옆으로 나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배흘림기둥에다 사방에 툇마루를 두른 강학당과 함께 널찍한 마당이 방문객을 맞는다. 강학당 뒤에는 스승의 집무실인 일신재와 직방재가, 오른쪽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자리 잡고 있다. 1495년 경남 함안의 칠원에서 태어난 주세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두터웠다. 주세붕이 7세 때에 어머니가 병석에 누웠는데, 자기 머리에 참기름을 부어 바르고 머리털을 마주 대어 이를 옮겨다 제거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해 문과 을과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라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주세붕의 명성은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널리 알려진다. 동리마다 오륜의 법을 계시하여 깨우치게 하였고, 백운동서원을 세워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영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는 자신의 봉급을 털어 굶주린 백성에게 식량을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 경차관敬差官, 암행어사 이해가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왕이 크게 흡족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풍기 특산물인 소백산 산삼을 조정에 바치느라 고생하는 주민들을 위해 산삼 씨를 직접 밭에 심어 퍼뜨리면서 인삼 재배를 장려하기 했다. 오늘날 풍기 인삼을 전국 으뜸으로 알아주는 것이 주세붕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세붕이 아니면 안 된다” 소수서원은 고풍스러운 옛 건물이 빼곡하지만 그 중심에 영정각이 있다. 주세붕은 서원을 건립하며 가장 먼저 순흥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했다. 지금의 영정각에는 안향을 주향으로 안축과 안보, 그리고 주세붕이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 유학자인 안향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린다. 47년 공직생활 동안 유학 진흥을 위해 학교 교육의 부흥에 전념했다. 주세붕이 안향이 젊었을 적에 독서하던 숙수사의 옛터에 서원을 세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안향을 뜻을 이어 유학의 정신으로 사회를 교화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세붕은 1549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게 된다. 당시 사간원 일동이 주세붕은 학식과 인격이 뛰어나므로 외지에 내어 보냄은 부당하다고 진언했다. 그러자 명종은 황해도 백성이 곤궁해 주세붕이 아니면 안 된다고 신하들의 청을 거절했다. 황해도 관찰사가 된 주세붕은 가장 먼저 최충崔沖을 제향하는 ‘문헌서원’을 창설했다. 교육이란 모름지기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그의 교육관이었다. 또한 형벌을 덜고 세금을 적게 거두었고,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다. 주세붕은 나이가 들수록 벼슬이 높아졌지만 그의 가난은 변한 것이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주세붕의 신도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세붕은 욕심이 없고 삼십여 년이나 벼슬하여 지위가 2품직까지 올랐으나 의복은 가난한 선비나 다름없고 식사에 두 가지 고기 반찬을 하지 않았으며 앉음에는 방석이 없고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으며 셋집에서 거처하며 봉급으로 생활의 만족감을 느껴 먹고 입은 나머지는 모두 친족을 구제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하더니 돌아가신 뒤 집에는 한 섬의 쌀도 저장이 없었다. 서원의 길은 담장 너머에 있는 길쭉한 사각형 연못 탁청지로 이어진다. 탁청지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룡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 조성한 연못이다. 이 연못과 서원의 담장 사이에 난 낙엽 쌓인 길은 경렴정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짧지만 서원에서 가장 운치 있는 길이다. 풍기 군수 시절 퇴계 이황은 전임자였던 주세붕을 그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소백산 남녘 빈터 옛 순흥 고을에 흰 구름 쌓인 곳에 죽계가 흐르도다. 인재를 길러 도를 높이니 그 공적 아니 거룩하리, 사당을 세워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은 일찍 없었던 일. 영재들이 모여 큰 덕을 사모하니, 갈고 닦음이 벼슬하기 위함이 아니로세. 옛 어진 이를 못 뵈었으나 그 마음을 보았으리니 방당에 비친 달빛이 얼음같이 마음을 맑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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