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에 청렴이 몸에 밴 두 정승 이야기 - 유관
유 관柳寬은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우의정에서 물라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다. 사람을 가리지 않아,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성명을 묻지 않았으니 신분을 따졌으랴!
초가 두어 칸에 밖에는 울타리도 담장도 없어, 태종 임금이 선공감繕工監을 시켜서 밤중에 바자[把子울타리]를 그 집에 에우게 하고는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어느 해 장마가 달이 넘게 져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麻대마]’ 줄기처럼 내릴 제 유관이 손수 일산日傘을 바쳐 비를 받으면서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일산고관이 행차 때 쓰는 큰 양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일산 없는 집에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부인의 항의 조 대답에 웃고 말았다.
그가 손님에게 술대접을 할 적에는 반드시 막걸리 한 항아리를 뜰에다 두고는 한 늙은 여종을 시켜서 사발 하나로 술을 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씩 마시고는 끝내었다.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 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들을 흩어 보내고 제삿날에 이르러서는 제생에게 음복을 시켰는데 소금에 절인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삼았다.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당신이 먼저 한 사발을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 돌렸다.
벼슬이 정승이 되어서도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어, 누구라도 찾아오면 한겨울이라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맞이했다. 더러 호미 메고 채소밭을 돌봤으나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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