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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 속 청렴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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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던 정승 - 고불 맹사성 고향집에 머물던 맹사성은 가까운 세교리 저수지에 낚시를 갔다가 그 마을에 사는 전 첨지라는 노인을 만났다. 고불은 자신을 ‘중리에 사는 맹 첨지’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낚시를 즐기다 고불이 가져온 보리개떡을 나누어 먹었다. 날이 저물어 헤어지면서 고불은 아무 달 아무 날이 내 생일인데 별로 먹을 것은 없겠지만 놀러 오라고 청했다. 가난한 농부였던 전 첨지는 맹 첨지의 생일이 다가오자 고민에 빠졌다. 마땅한 선물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다 못해 맹 첨지가 좋아하는 보리개떡을 만들어 싸들고 중리로 찾아가 사람들에게 맹 첨지 댁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지 맹 첨지의 집은 가난한 초가가 아니라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게다가 집 앞에는 여러 채의 수레와 가마, 여러 마리의 말이 늘어서 있었다. 전갈을 받은 고불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생일을 축하하러 온 고관들에게 낚시친구 전 첨지를 소개했다. 그때야 낚시터에서 만난 맹 첨지가 바로 유명한 맹 정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 첨지가 전날의 무례를 백배사죄했다. 그러자 고불이 말했다. “이 보오, 전 첨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오. 내 비록 벼슬이 정승이라고는 하나 만백성이 내 벗이 아니겠소? 그러니 사죄니 뭐니 하는 말은 말고 앞으로도 자주 함께 낚시를 즐깁시다”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은 황희 정승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치세를 도와 조선왕조 초기에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이요 청백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사람은 많지만 성이나 아호 뒤에 ‘정승’을 붙여 부르는 이는 대체로 4명밖에 없다. 황 정승황희, 상 정승상진, 오리 정승이원익, 맹 정승맹사성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식과 덕망이 높았고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쳤으며 모범적인 청백리였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고불 맹사성은 풍류 정신으로 한평생을 유유자적하며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높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게 백성들과 어울림에 격이 없었고, 평소 말이나 가마 대신 "기린" 또는 "기리마"라고 부른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 맹사성 유적인 맹씨 행단盟氏 杏壇은 충남 아산 설화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드물게 북향집이라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길한 자리라고 알려졌다. 맹씨 행단은 고불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杏壇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나 후학에게 글을 가르치고 공부하던 자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고불의 21대손 맹건식씨가 사는 시골집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두 그루 은행나무가 눈에 띈다. 이 나무는 고불이 심은 원목의 후손으로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 은행나무 앞으로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고택이 서 있다. 이 집의 본래 주인은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이다. 1330년 최영의 부친인 최원식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최영장군이 죽음을 당하여 비어 있던 집에 고불의 아버지인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한산을 거쳐 이곳에 와 은둔하며 살았다. 고불은 이곳에서 자랐고 최영의 손녀와 결혼하게 된다. 고택의 마루에 앉으니 따뜻한 볕이 쏟아진다. 아담한 마당 앞으로 건너편 배방산이 가득찬다. 세종과 황희를 만나다 고불은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7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어머니를 추모하며 3년 동안 묘막 생활을 했다고 한다. 고려 우왕 12년1386년 27세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로 벼슬길에 올라 이후 33세까지 여러 하급 관직을 맡았는데, 그 사이에 큰 정변이 일어났다. 이성계가 최영·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을 잇달아 숙청한 뒤 1392년 마침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태조로 등극한 것이었다. 이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새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자 맹희도는 아들에게 출사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권했다. 그렇게 새 정부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한 맹사성은 태종 6년1406 8월에는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벼슬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조와 태종의 측근으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질시를 받았고, 특히 청렴강직한 성품대로 공무를 집행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죽을 뻔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 1419년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며 고불은 이조판서를 거쳐 68세가 되던 세종 9년1427년에 마침내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같은 날 황희는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세종 13년1431년 황희는 영의정으로, 고불은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세종의 치세를 뒷받침했다. 세종대왕은 두 사람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황희는 강직한 데다 매사가 분명하고 정확하여 학자적 기질이 농후했다. 반면 고불은 예술가적 심성이 짙어 부드럽고 섬세한 데다 어질었다. 그래서 세종은 결단력이 요구되는 이조 병조와 외교문물의 제도 정비 등은 황희에게 맡기고, 유연성이 필요한 예조 공조와 과거응시자들의 학문적 점검 등은 고불에게 맡겼다. 고택 뒤로는 긴 돌담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돋운다. 돌담 왼편으로 작은 쪽문이 보이는데, 그곳으로 나가 200m 가면 구괴정九槐亭이 나온다. 구괴정은 삼상당三相堂이라고도 하는데 세종 때의 정승인 황희·맹사성·권진이 느티나무를 세 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 그루의 고목만이 남아 있다.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건너편 배방산이 아른거린다. 그 시원한 풍취에 호탕한 마음이 들면서 고불의 강호사시가 한 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막걸리를 냇가에 앉아 먹는데 금린어쏘가리를 안주 삼고…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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